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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meeny
폭탄이라도 터지는 것처럼 폭죽이 터진다. 21세기다. 지구 반대편에서부터 시작한 축제가 자전 속도를 따라 돌고 돌아 한국까지 도달했다. 거리에 사람들이 넘쳐나고 모두들 뉴 밀레니엄을 축복했다. 뉴 밀레니엄이니 새천년이니 하는 것들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듯 21세기가 도래했고 그랬건 말건 나는 지독하게 우울한 청춘을 살고 있었다. 말하자면 너무 일찍 늙어버린 것이 아니었던가 싶다. 하지만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피할 수가 없는 승부인 것이다. 구회 말 이사 만루의 사번 타자라도 되는 것처럼, 눈을 감아도 등을 돌려도 수천 명의 관중은 사라지지 않는다. 전광판의 점수도, 시합의 결과도 모두 그대로다. 게다가 세상은 언제나 정직한 직구만을 던져주지는 않는다. 볼 하나 차이로 스트라이크 존을 벗어난 슬라이더- 그리고 내가 휘두른 것은 꼴사나운 풀스윙이었다. 공허한 배트 소리가 바람을 가른다. 그 해 봄, 나는 소리도 없이 대학에 합격했다. 축하할 이유도 비난할 이유도 없는 적당한 성적이었다. 강타자의 쓸쓸한 퇴장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스무 살이었고 눈을 떠보니 술을 마셔도 되는 나이였다. 비전이 보이지 않는 지리멸렬한 인생이 어깨에 걸터앉아 손을 흔들곤 했다. 안녕, 안녕. 집이 어려웠고 부모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대입을 앞둔 여동생이 수시로 부부싸움을 말려야 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깨진 전화기나 접시가 놓여 있었고 아버지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여동생은 일찌감치 침대에 누웠지만 보나마나 울고 있었을 것이다. 잠시도 머무르고 싶지 않은 집이었다. ‘보다 나은 성적’을 이유로 집을 나왔다. 월세 20만 원짜리 자취방이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비워져 있었다. 한 쪽 벽에 곰팡이가 피어 있는 반지하였다. 대학은 왔지만 친구를 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그건 고등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나같이 어려 보였고 생각 없이 사는 인생들이었다. 이럴 바에야 철저하게 고립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수염과 머리를 길렀다. 담배는 럭키스트라이크만을 피웠다. 씁쓸한 맛이 좋다고 떠벌리고 다녔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멋이었다. 그 시절의 술집에는 보기 드문 답배 한 갑에 열광하는 얼간이들로 가득했으니까. 놀랍게도, 그 모습을 보고 비슷한 무리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우스운 건 그 얼간이들이 하나같이 핑크플로이드와 도어즈에 열광하던 청춘이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듣지 않는 지난 세기의 락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는 클래식와 양주와 여자에 열광하는 부르주아를 비웃었다. 그리고 도무지 누가 부르주아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그 얼간이들 중 한 명은 돈 많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비엠더블유를 가지고 있었다. 비엠더블유의 주인은 희원이라고 불리는 동기였다. 학기 초에 교수에게 대들고는 아예 수업에도 들어가지 않는 녀석이었다. 여당이니 야당이니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던 교수의 모습이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보수진영을 옹호하던 교수에게 마시고 있던 음료수를 쏟아 부었다고 했다. 징계를 먹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희원의 아버지가 꽤나 이름이 알려진 국회의원이라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혁명과 투쟁에도 권력은 필요하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말했지만 희원은 그 사실이 부끄러워 죽을 지경인 모양이었다. 거대한 덩치와 굵은 손가락에 어울리지 않게 섬세한 기타연주를 해내던 희원은 나와 가장 어울리는 부류였다. 돈이 많았고, 도대체 무얼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몰라 허둥댔으며 그렇지만 별 걱정 없이 살았다. 그는 내가 어떤 종류의 고민을 하건 한 마디로 정리하는 놀라운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힘들어하는 내색을 보이는 친구가 있으면 희원은 주저 않고 마셔. 라고 말할 뿐이었다. 얼굴에는 득의만면한 미소를 머금고. 그렇게 새벽의 도로를 질주하는 건 기분이 좋았다. 분명 그 시절의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언제나 반쯤 취해있었고 언제나 반만 열심히 살았다. 술병이라도 집어 던지면서, 속도위반 카메라를 향해 가운데 손가락이라도 날리면서. 분명 그렇게 기분 좋게 살았다. 이대로 살다 죽어도 좋겠다 싶었다. 스무 살의 인생이라는 건 그랬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 따위는 개나 줘 버리라지. 정치가 어떻건 테러가 어떻건, 바다 건너 세상에서는 스커트 미사일이 날아다니는 시대에도 우리는 도로를 달렸다. 종로 거리에서도 강남 거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거리를 가득 매운 간판과 청년실업과 대기업과 경제난 따위의 풍경은 그 시절의 시간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갔다. 시간은 그렇게 흐른다. 뉴 밀레니엄이 빛의 속도로 멀어졌다. 축복도 멸망도 없는 그저 그런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봄, 여름, 가을이 순리에 따라 자전에 따라 차례대로 지나가고 겨울이 찾아올 때까지 우리는 그렇게 살았다. 대학에도 겨울방학이 있다는 사실을 축복이라고 여기면서. 분명, 한 여자가 럭키스트라이크 연기를 뿜으며 달리던 비엠더블유 앞으로 뛰어들기 전까지는 그랬다. * 끼익. 타이어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우리들 중 누구도 비엠더블유에서 내릴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말하자면 그것은 견고한 성과도 같은 존재였다. 곱게 선팅한 비엠더블유의 가죽 시트에 앉아 있으면 세상 어느 것도 우리를 위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설령 그게 긴 생머리를 한 생면부지의 여자라도, 그녀가 혈관까지 내비칠 것 같은 투명한 피부를 가지고 검고 큰 눈동자로 인적 없는 도로에 누워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해도. 물론 그건 잘못된 판단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세상에는 비엠더블유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녀의 목소리가 그렇다. 괜찮은 것 같아요. 그녀가 대리석같이 곧고 긴 다리로 아스팔트에서 일어나 첫 마디를 열었을 때 나는 문득 생각했다. 도대체 럭키스트라이크와 비엠더블유와 핑크플로이드와 도어즈는 다 뭐였던가. 세상의 중심이 이동해버린 것 같은 왕복 4차선의 도로에서, 나는 문득 생각했다. 가능하다면 그대로 좀 더 있고 싶었다. 이 여자의 작은 머리를 팔에 얹고서 그 숨소리를 듣고 있을 수 있다면 죽을 만큼 행복할 것 같았다. 설령 희원이 비엠더블유 안에 숨어 이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죽을 만큼 걱정하며, 합의금과 보험료와 뺑소니와 실존주의를 떠올리며, 손톱만 물어뜯고 있다고 해도. 여자는 다행히 차에 부딪친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병원으로 데려다주겠다는 걸 만류하고, 그럼 치료비라도 드리겠다는 것도 거절하고, 그렇다면 연락처라도 달라는 말에 밥이나 사달라고 대답한 그녀에게 우리는 모두 굴복했다. 하지만 골치 아픈 일에 엮이는 것이 싫었던 희원은 나와 그녀를 어느 대학가 한 쪽에 던져놓고는 달아나버렸다. 그는 잘해봐, 라는 말을 잊어버리지 않았지만 도무지 뭘 잘해봐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이상한 일이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한 세상을 가소롭게 비웃으면서 새벽 거리를 질주하고 있었는데 어느 틈에 클래식이 흐르는 커피숍에 앉아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는 사랑과 희망으로 가득한 것이 분명한 여자가 앉아 있다. 바하인지 바흐인지를 들으며 벽에 걸린 클림트인지 에곤쉴레인지를 바라보았고 날개옷이라도 잃어버린 듯한 여자를 마주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이름도 아름다운 오므라이스에서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올랐고,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옷에 배인 담배 냄새를 쫓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깨달은 것이 있었는데, 여자와 이야기하는 것은 생각보다 즐겁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 십자수나 딸기 쉬폰 만드는 법 따위가 주된 대화내용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이념과 혁명이 주된 내용도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너바나를 알았고, 그것도 뉴욕 언플러그드 버전의 about a girl을 좋아했고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뷰욕을 생각 없는 머저리라고 표현할 줄 알았던 것이다. 스티브 부세미는 지구 최고의 미남이에요, 라고 그녀가 가장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을 때 나는 그만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다. 저녁 무렵, 우리는 말을 놓았고 몇 가지 비밀을 털어 놓은 사이였다. 소주 세 병과 맥주, 소시지와 라면과 과일 안주를 차례대로 뱃속에 쌓아올린 다음의 일이었다. 그녀는 미대를 다니고, 지금은 휴학 중이며 딱히 하는 일은 없이 빈둥거리고, 강아지를 한 마리 키우고 있고, 군대에 간 동생이 하나 있었으며, 나보다 네 살이 많았다. 나는 잔뜩 꼬인 혀로 그녀에게 물었다. 정말? 네 살이나? 응. 졸업하고 다시 들어왔으니까, 학번은 같아. 위태롭게 쌓아올린 바닐라아이스크림을 핥으며 그녀가 말했다. 어쩐지 머릿속이 복잡해서 인적 뜸한 골목길을 걷다가 전봇대 하나를 부여잡았다. 밝게 빛나는 가로등 아래였다. 쓰레기 더미 위로 과일 안주와 라면과 소시지와 맥주, 소주 세 병이 차례대로 쏟아졌다. 초겨울의 밤은 추웠다. 비엠더블유가 사라진 거리에서 우리는 새로운 성을 찾아야 했다. 목도리 사이로 찬바람은 아무 거리낌 없이 스며들었다. 쉬었다 가자. 그녀가 흐릿한 달빛을 배경으로 말했다. 초고속 인터넷 설치. 주변의 모텔들이 하나같이 아름답게 반짝인다. 동화 속의 성을 연상시키는 구조물이 하늘을 수놓는다. 그녀가 공주처럼 부드러운 손길로 나를 이끌었고 하지만 씩씩한 걸음걸이로 입궐한다. 철통같은 경비원들은 대실비 3만원에 문을 열어주었고 그 곳에는 말로만 듣던 물침대와 말로만 듣던 콘돔과 말로만 듣던 거울이, 아니 거울은 본 적도 있지만 아무튼 확연히 용도가 다른 거울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이건 분명 이상한 일이다. 나는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성인비디오나 보며 침을 흘리던 청춘이었는데 어느새 진짜 여자를 안고 있었다. 평면이 입체로 바뀌는 순간은 언제나 경이롭다. 굳이 유수한 평면TV광고를 들먹일 것도 없다. 누군가가 누군가와 연인이 되고 헤어지기까지는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 약간의 명분과 용기가 있으면 얼마든지 가능한 것, 그리고 사실 그 자체는 그다지 큰 희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지구가 멸망하고 둘 만 남았다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위안이 되는 그녀의 품속에서 눈을 떴다. 우리들은 별다른 희생이 없이 연인이 되었다. 그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그녀가 이제 우린 사귀는 사이야, 라고 국어책을 읽어대듯 또박또박 말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상황을 더욱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연애였다. 스티커사진을 찍거나 커피숍에서 팥빙수를 먹거나 영화를 보고 밥을 먹었다. 어중간한 연애였지만 나는 철저하게 그녀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활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이었다. 밥을 먹고, 학교에 가고, 잠자리에 드는 일과를 그녀와 함께 했다. 희원이 가끔 서운한 말투로 졸지에 과부가 되었노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 즈음에는 희원도 클럽에서 만난 여자를 맘에 두고 있는 터였다. 이렇게 어른이 되어가는 거구나. 연애 따위가 어른을 만들어주는 길이라고는 인정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머리를 짓누르던 고민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다는 데는 철저하게 동의했다. 우리들 중 아무도 마르크스와 체 게바라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애초에 가족들이라는 건 내 사생활에 무관심한 사람들이었고, 오히려 그 편이 좋았다. 여자 친구와 부모님이 마주하고 앉아 있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아버지는 뭐하시나, 졸업하면 뭘 할 생각인가, 따위의 질문이 오가는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그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족들에게는 연애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에게 딱 한 번 그 사실을 들킨 적이 있었다. 몇 달째 집에도 들르지 않고 자취방에 기거하는 아들을 걱정한 아버지의 갑작스런 방문이었고, 미처 옷도 입지 못한 채 침대에 뒤엉켜 있는 모습을 들킨 상태였다. 아버지는 붉어지는 얼굴을 감추지도 못한 채 뒤돌아섰다. 조심해라. 조심하라니, 무얼 말인가. 방문은 걸어 잠그고 하라는 말인지, 대낮부터 그 짓거리는 곤란하지 않느냐는 소린지, 아니면 덜컥 임신이라도 해버릴까 걱정하셨던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나도 모르게 네, 라고 대답하고 말았다. 그 무렵의 부모님은 이혼을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섣불리 결혼하는 걸 조심하라는 말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침대로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나 했지만 기분이 개운하지가 않았다. 아귀가 잘못 들어맞은 나사가 삐걱대는 느낌이었다. 우리 가족을 지켜보는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뭔가 잘못되고 있다, 뭔가 조심스럽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부모님은 조심스럽지 못한 결혼의 결과로 며칠 후 이혼을 했다. 어머니에게서 전해져 온 무덤덤한 통보였다. 증인이 필요하다고 했고 두 사람이 도장을 찍는 장면을 변호사와 함께 지켜보았다. 문득 내가 저 두 사람의 정자와 난자로 만들어졌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우리는 닮은 구석이 없다. 닮은 구석이야 어찌 됐건 내 유전자를 구성한 장본인이 완전히 갈라서는 순간이었다. 아, 생각해보라. 20년인 것이다. 20년 동안 한 침대를 쓰던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져버린 것이다. 두 사람의 반생(半生)이 삐걱대는 모습은 유쾌하지 않았다. 재산을 나누고 호적을 정리했다. 애초에 정은 없었지만 낡은 집을 떠나 각자의 터전을 마련했다. 자취를 하던 나만 무관심한 척 두 사람의 이혼이 정리될 때까지 한 발 물러나 있었다. 중요한 시험이 있다는 보기 좋은 핑계를 마련해 놓은 채였다. 가족들은 다 아는 사실을 모르는 척 눈감아주었다. 이래저래 연기에 서툰 혈육이었다. 곪았던 상처가 터졌지만 지독한 후유증이 몰려왔다. 가장 연기에 약한 아버지는 며칠 후에 풍을 맞아 쓰러졌다. 일주일이면 괜찮아진다고 했지만 아버지의 얼굴은 어떻게 보아도 금방 나을 사람의 몰골은 아니었다. 광대뼈가 눈에 띠게 돌출해 있었고 흰머리와 주름살이 며칠 사이 부쩍 늘어나 있었다. 왼쪽 손, 왼쪽 다리에는 마비증상이 왔다. 이혼 직후 마련한 단칸방에는 하루 종일 탕약 달이는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는 거인 같았다. 그 어깨에 올라 앉아 골목을 돌아다니는 동안은 뒤에서 발목을 물던 옆 집 똥개나 힘깨나 쓰던 형들도 덤비지 못했다.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권력 위에서 나는 생각했다. 영원히 쓰러지지 않을 제국이라고. 그건 어린 시절의 나에게 수억 짜리 비엠더블유보다도 몇 배는 더 견고한 성벽이었다. 후레쉬맨도 넘보지 못한다. 아버지는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볼 수 있는 오백 원짜리 영웅보다 몇 배는 위대한 존재였던 것이다. 그 거인이, 그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제국이 쓰러져버렸다. 그것도 열 평짜리 전세방에서 풍을 맞고. 내가 아는 누구보다도 초라한 퇴장이었다. 다니던 회사에서는 나이를 고려해 일찌감치 권고사직을 결정한 모양이었다. 도대체 직장을 잃은 40대 후반의, 게다가 몸이 아픈 남자들은 어떻게 살아남으란 말인가. 몸은 괜찮으세요? 괜찮을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지만 이제 막 세척을 끝낸 식기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혼 후 옮긴 아버지의 전세방이었다. 여동생이 집을 돌보고 있었지만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여자아이의 손길이 야무질 리가 없다. 말라붙은 밥그릇이 세척대에 놓여 있었고 아버지는 죽을 먹다 말고 돌아누워 있었다. 일이 잔뜩 꼬이고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이십대라는 것은 그런 시기다. 합법적으로 술을 마시고 여관을 들락날락거려봐야 해결책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런 것은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는다. 전 부인으로서의 의무감에서였는지 아니면 혼자 병수발을 드는 여동생이 안쓰러웠는지 아버지의 집으로 어머니가 가끔 찾아왔다. 나을 때 까지만 오는 거예요. 어머니는 못을 박듯 아버지에게 말하곤 했다. 아버지도 그 상황이 편치 않았는지 의미를 알 수 없는 신음소리만 연달아 내곤 했다. 잠깐이긴 하지만 다시 집안이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하는 기대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겨우 스무 살 먹은 내 머리로는 이십 년 동안 쌓인 앙금이 어떤 것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버지 팔다리를 주무르고 머리에 수건을 올려놓고 죽을 쑤는 순간에도 콘크리트처럼 단단한 미움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와 여동생만으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나도 아버지와 함께 한동안 생활하기로 했다. 걱정을 할 것 같아 희원에게는 잠시 여행을 다녀오겠노라고 말한 상태였다. 겨울 방학 여행이라, 그거 좋지. 녀석의 듬직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하지만 그녀에게만큼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달려오겠다는 걸 극구 말려야 했다. 너까지 끼어들면 일이 더 복잡해져. 어디까지나, 가족 문제니까. 그녀는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댔다. 네가 언제부터 가족 운운하고 있었냐. 그 질문에는 도무지 대답을 할 수가 없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애써 그녀를 달래야 했다. 불안한 느낌은 오래 가지도 않았다. 어찌 해도 아버지의 병은 낫질 않고, 어머니와 여동생의 잔소리가 늘어갔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터지기 일보직전의 시한폭탄이라도 보고 있는 듯한 심정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 시한폭탄은 영화에서나 보던 것처럼 1초를 남겨놓고 멈춰주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버지의 집에서 죽이 눌러 붙지 않게 휘젓고 있노라니 안방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에잇, 더러워서 못 하겠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더니 어머니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달려 나오고 있었다. 불러 세우려고 했지만 금세 사라져버렸다. 나는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인가 해서 안방으로 뛰어 들었다. 아버지는 등을 돌린 채 벽에 붙어 흐느끼고 있었다. 아버지는 뒤도 돌아보지 못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이불을 걷자 지린내가 코를 찔렀다. 아버지가 똥을 지린 거였다. 아. 나는 멍하게 입을 벌리고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버지의 불룩한 바지가 더할 나위 없이 처량했다. 뉴밀레니엄을 알리던 폭죽처럼, 새로운 절망을 알리는 시한폭탄이 터진다. 아버지의 울먹거림을 들으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한동안 나는 아버지를 찾지 않았다. 어머니도 찾아가지 않았다. 가족과 엮여 있다는 사실부터가 지독하게 원망스러웠다. 이제 막 고3을 앞두고 있는 여동생이 마음에 걸렸지만 여동생은 씩씩한 아이였다.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지만 오히려 머리가 온통 복잡해서 도저히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었다. 학교에 가지 않고, 가더라도 언제든 달려올 수 있는 녀석이 생각났다. 희원은 네온간판도 달려있지 않은 술집에 추리닝 차림으로 나타났다. 아버지가 아프셔. 희원이 물고 있던 담배에서 힘없이 재가 떨어졌다. 어쩌다가? 자기 아버지가 쓰러지기라도 한 것처럼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였다. 병원비는? 간호는 누가 하고? 오히려 내 쪽에서 희원을 안심시켜야 할 지경이었다. 사정을 들은 희원은 말수가 적어졌다. 그 큰 덩치가 유난히 작게 느껴졌다. 미안하다 도움이 못 돼서. 그 말을 듣고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유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마셔. 그 날 새벽의 비엠더블유에서는 비틀즈가 흘렀다. across the universe가 그렇게도 슬프게 느껴질 줄은 비틀즈도 몰랐을 것이다. 희원은 액셀레이터를 밟았다. 계기판의 눈금이 금방 100을 넘어섰다. 성능 좋은 엔진은 눈앞에 펼쳐진 소실점을 향해 질주했다. 지구가 희원과 나와 속도와 소실점만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이 속도라면 정말이지 우주를 가로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막 은하수 너머 미지의 혹성으로 달려가던 내 주머니 속에서 전화가 울렸다. 항해사들은 긴급 회송을 외쳤고 우주의 한 가운데서 들려온 비보는 광활한 우주 전체를 일순간에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가느다란 진동이 카운트다운을 일순간에 정지시켜버린다. 목적된 궤도에 도달한 우주왕복선 같이 희원은 속도를 줄였다. 여동생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침착한 목소리였지만 울음을 참는 목소리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날을 절대 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여동생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사실을 알 수가 있었다. 나는 여전히 취해있었고 여동생의 입에서 나온 말은 도무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비현실적이었다. 때문에 꿈이라도 꾸는 것이 아닐까, 하며 멍한 얼굴로 머리를 수차례 쥐어박아야 했다. 하지만 머리는 아팠고, 여전히 차는 느린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희원은 옆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노래는 아직도 계속해서 비틀즈의 across the universe였고, 이대로 가다가는 고급 승용차에 먹은 것을 그대로 게워낼 것만 같았고, 그래서 나는 희원에게 차를 세워달라고 했다. 어디선가 가느다란 비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기 때문에 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직은 공기가 차가운 3월의 어느 새벽이었다. * 나는 시신 앞에서 거짓말처럼 침묵했다. 가장을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전 남편의 주검을 바라보는 어머니가 몰래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다만 아버지의 시신만이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꽉 움켜쥔 주먹을 어루만진다. 그런 사람이다. 죽는 순간까지 혼자였던 사람이다. 포르말린 냄새가 가시지 않은 병실이 벌써 무덤이라도 돼 버린 것처럼 적막했다.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무좀과 치질로 고생했다. 말 그대로 앉으나 서나 고생인 질병들을 달고 다녔기 때문에 언젠가 무좀과 치질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지만, 결국 치명타를 날린 것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사였다. 손목 깊숙한 상처를 보고 있으려니 가슴 한 편이 아려왔다. 과도로 손목을 그었다나보더라. 그 칼이 잘 베일리가 있나. 몇 번씩 그어댔으니 얼마나 아팠을까. 어머니는 가슴을 두드리고, 가끔씩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곤 했다. 여동생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말이 없었다. 어깨를 두드려도, 머리를 쓰다듬어도 반응이 없다. 뒤늦게 희원에게서 소식을 듣고 달려온 여자 친구만이 이 곳 저 곳을 돌아다니며 희원과 함께 병원 절차를 밟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도무지 아버지를 위해 뭔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와 여동생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이없게도 졸음이 밀려왔고, 문득 가족이 모처럼 한 자리에 모여 있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블랙코미디라도 보는 것처럼 쓴 미소가 번졌다. 장례식장은 밝고 유쾌했다. 지난 며칠 사이에 이름도 알 수 없는 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어디선가 사람들은 태어나고 죽어가고 있다. 그 중에 한 명이 아버지였던 것뿐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애써 슬퍼하지 않았다. 칸칸을 나누어 놓은 방마다 조문객들이 가득 차 있었고 밤이 깊도록 시끄러운 소리가 가시질 않았다. 한 쪽에서 도박판이 벌어지는가 하면 한 쪽에서는 술에 취해 곯아떨어진 무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쓸쓸할 줄 알았던 분향소에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친구가 많았었나 싶을 정도로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희원은 연신 음식을 나르며 일하고 있었다. 누가 보면 가족이라도 되는 줄 알았을 것이다. 처세술이 좋았다. 국회의원인 아버지의 피라도 물려받은 걸까. 조문객이 뜸해질 때쯤 분향소를 나오자 그녀가 서 있다. 검정 벨벳 재킷과 레깅스를 입고 있었고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근엄해 보이는 어른들이 지나가며 한 마디씩 하려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옆에 가서 앉자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손목을 그으셨다며. 흰 담배연기가 차가운 대기 속으로 흩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랬을까. 그녀가 필터 끝까지 담배를 빨았다. 한 번 더, 흰 담배연기가 조각조각 부서진다. 그녀는 다시 한 번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날, 사실은 자살하려던 거였어.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다. 언뜻 보기에도 비싸 보이는 외제차라면 죽더라도 가족에게 비싼 보험료나 합의금 정도는 남길 수 있겠다 싶어서.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야단맞는 아이라도 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중얼거렸다. 다들 왜 그런 걸까. 그냥. 힘들어서. 힘들었다는 말이다. 아버지도 손목을 긋기까지 50년이 걸렸는데, 고작 스물네 살 먹은 여자아이가 뭐 그리 힘들었을까. 하지만 차에 뛰어들 정도였으니 정말로 힘들었나 싶기도 하고, 그럼 나는 죽기 전에 한 번 만나볼까 하는 남자밖에 안 되는 거였나 하니 실망스럽기도 해서 도통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여태 본 적 없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야. 그녀를 보고 있으면 위로가 된다. 단순한 격려가 아니다. 내가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아버지는 내 덕분에 좀 더 살고 싶지 않았던 걸까,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말이 나오기도 전에 그녀가 손을 감싸 쥐었다. 좋아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죽는 건, 미안하잖아. 나는 생각했다. 아마 아버지는 관 속에 누워서 죽도록 미안해하고 있는 걸까. 장례는 무리 없이 끝이 났다. 장례식이 끝난 후 며칠 동안 희원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자취방에 들르지도 못한 채 며칠 동안 아버지의 집과 어머니 집을 오가며 남은 일들을 정리해야했기 때문에 나 역시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녀석은 나보다도 치밀했다. 신경 쓰지 못한 부분들과 법률적인 조언이 빼곡히 적힌 종이가 그녀를 통해 배달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희원이 전해달라던 말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희원 씨, 군대 갔어.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다. 나한테 말도 없이? 응. 그러는 쪽이 더 편하대. 녀석 다운 행동이었다. 메모는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하다는 글과 1년 동안 즐거웠다는 이야기와 다녀와서 얘기하자는 이야기와 어머니를 잘 모시라는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어디로 입대하는지도 말하지 않았다. 녀석 다운 퇴장이라고 생각했다. 구원투수라면 구원투수였고 대타라면 대타였다. 고맙다는 말도 듣지 않고 그렇게 희원이 떠났다. 4월의 어느 아침이었다. 하루 종일 지독한 황사가 불었다. 커트 코베인이 불타 오른 날이기도 했다. CD플레이어의 배터리를 두 번 갈아 끼울 때까지 across the universe를 들었다. 모든 것들은 변한다. 이것만이 분명한 진리다. 떠나간 사람은 때가 될 때까지는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관이 끝나고, 이것저것 정리가 끝났을 때는 이미 보름이 훌쩍 지나있었다. 자취방으로 돌아오자 악취가 코를 찔렀다. 시체라도 썩고 있는 걸까 싶었다. 문틈에는 메모가 끼워져 있었다. 누전으로 전기가 나갔습니다. 사람이 없어서 쪽지 남깁니다. 누전차단기를 올리면 다시 작동될 겁니다. 언제 남긴 메모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냄새로 미루어보아 적어도 일주일은 된 듯싶었다. 날씨는 죽어버린 것들을 빠른 속도로 부패시켰다. 환기도 되지 않는 냉장고 안에 반 토막 난 고등어가 아가미를 뻐끔대고 있었다. 손을 갖다 대자 구더기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었기 때문에 나는 냅다 문을 닫아버렸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반지하 원룸에 시큼한 냄새가 퍼졌다. 전원이 빠진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침대 위에 엎드렸다. 미처 방전되지 못한 전기가 남아 온 몸을 훑는 기분이었다. 짜릿하다고 할까, 알싸하다고 할까, 뭉클하고 쓰라리다고 할까, 아무튼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는 기분이 한 차례 휩쓸고 갔다. 한숨을 내쉬자 온 몸에 힘이 빠져 나간다. * 편의점에서 페브리즈와 하이트 맥주캔, 그리고 콘돔 하나를 집어 드는 걸 본 점원은 졸린 듯 하품을 하면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요즘 들어 도난 사건이 자주 일어난다고 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경계의 대상이 되는 건 전혀 반갑지 않다. 여고생들 사이에서 콘돔을 집어들 수 있는 당당함과는 별개의 문제다. 새벽 두 시의 편의점은 참을 수 없을 만큼 고요하다. 어둡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불이란 불은 다 밝혀서 편안한 분위기도 아니다. 도무지 편의점이라고 불러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물건을 챙겨 도망치듯 집으로 달렸다. 찢어진 슬리퍼 한 짝이 다급하게 아스팔트 위를 질주했다. 왔어? 그녀의 어깨가 달빛을 받아 반짝였다. 캔 맥주 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려 퍼졌다. 가구라고는 밥상 하나와 냉장고와 침대가 전부니까 이상한 일도 아니다. 들어와. 그녀가 이불 한 쪽을 들며 말했다. 옆구리에 난 작은 흉터와 가슴에 박힌 사마귀가 살짝 내비친다. 어서. 들어와. 나는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속을 파고들었다. 가느다란 팔을 베고 누워 심장소리를 듣는다. 부드러운 피부를 쓰다듬으면서, 작은 가슴을 만지면서 심장소리를 듣는다. 그녀가 간지러운 듯 웃는다. 어머니는 괜찮을까. 그녀는 짧게 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굴을 찡그린 걸까. 하지만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무딘 실루엣만 창문에 어른거렸다. 썩는 냄새 좀 봐. 환기 시켜야겠다. 오랫동안 열지 않은 창문이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맞은 집의 벽이 우두커니,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었다. 그녀의 우유를 뿌린 실크처럼 부드러운 등을 보면서 나는 말했다. 활처럼 둥근 근육이 탄탄하게 그녀를 지탱하고 있었다. 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 생각해봤어. 발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도 괜찮을까. 걸레랑 옷을 같이 세탁해도 괜찮을까. 휴대폰 배터리를 미리 충전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AM을 들어도 괜찮을까. 음식물 쓰레기를 따로 버리지 않아도 괜찮을까. 바퀴벌레를 아무렇지 않게 죽여도 괜찮을까. 같은 영화를 세 번씩 봐도 괜찮을까. 이렇게 20대를 흘려보내도 괜찮을까. 그런 것들을 생각해본 거야. 그녀가 내 등을 쓰다듬었다. 다들 편하게 살고 있어. 조각난 달빛이 성능 좋은 향수처럼, 악취를 몰아낸다. 될 대로 되라고 해. 넌 너무 생각이 많아. 우리는 희미하게 빛나는 달빛을 보며 웃었다. 거의 무너졌던 인생의 조각이 조금씩 맞춰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괜찮아, 괜찮아. 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그녀의 손길을 느낀다. 반지하의 원룸에, 인생을 단숨에 얼려버릴 것처럼 차가운 공기가 텅 빈 우주를 가로질러 밀려든다.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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